[한경 아르떼 추천 전시⑧]
도전의 흔적과 실험의 빛,
작품 속에 스며들다
2025.12.03
전시정보
| 전시명 | | 사진이 할 수 있는 모든 것 |
|---|---|
| 기간 | | ~2026.3.1(일) |
| 장소 | | 서울시립사진미술관 |
김건희<얼얼덜덜>(1980) ⓒ서울시립사진미술관
신문 기사 사진을 활용해 당대 현실을 비판적으로 탐구해낸 김건희(80)의 <얼얼덜덜>(1980)은 유희적인 언어로 권위주의 체제 아래 확산된 시대의 공포와 감각의 마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김 작가는
1980년 5월 21일자 신문에 실린 10·26 사건 대법원 판결문을 배경으로 삼아 그 위에 아이스크림 쮸쮸바 광고 속 문구 ‘얼얼덜덜’을 겹쳐 이미지를 만들었습니다. 이는 서울시립사진미술관 전시 작품 중에서도 눈에
띄는 골계미를 함축한 작품이기도 합니다. 서울 창동 서울시립사진미술관에 마련된 전시 <사진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에서 마주한, 웃지 못할 시대의 기록입니다.
11월 26일 서울시립 사진미술관의 세 번째 개관특별전 <사진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이 개막했습니다. 한국 현대미술사의 내로라 하는 작가들 36명이 남긴 사진과 사진을 기반으로 한 작업 등 총 300여
점을 소개하는 대규모 전시입니다. 사진이 ‘실험의 매체’로서 한국 현대미술에 어떻게 작동해 왔는지 시대의 흐름에 따라 살펴볼 수 있습니다. 작품 중에는 자연 이미지에 회화나 판화를 접목하면서 순수예술의 경향성을 띠는
것도 있지만 시대상을 기록한 사진에 작가들이 각자의 세계를 담아 재창조한 작품들도 적지 않습니다.
이강소 <리퀴텍스-76122>(1976), 캔버스에 세리그래피. ⓒ서울시립사진미술관
전시는 사진미술관 개관 이래 처음으로 1~4전시실 전관을 모두 사용합니다. 미술관 측은 “1960년대 실험미술부터 동시대에 이르기까지 사진이 회화, 판화, 퍼포먼스 등을 넘나들며 확장해 온 과정을 동선에 따라 자연스럽게 읽도록 구성했다.”고 밝혔습니다. 전시에는 수십 년간 공개되지 않았던 김명희(76), 이강소(82), 장화진(76) 작가 등의 자료들도 대거 포함됐습니다. 특히 이강소 작가의 초기 포토세리그래피 등은 한국 실험미술의 흐름을 재구성하는 데 중요한 사료적 가치를 지닙니다. 청년 시절 이건용(83)과 성능경(81) 작가가 서로의 작업하는 모습을 앵글로 담은 작품도 눈에 띕니다.
곽덕준 <포드와 곽>(1974), 젤라틴 실버 프린트. ⓒ서울시립미술관
전시는 1960년대 실험미술 세대의 현장을 복원하는 1전시실부터 시작합니다. 사진을 현상하는 암실과 같은 어두컴컴한 공간에 전후 1세대로 불리는 작가 이승택(93)과 김구림(89)의 작품이 진열돼 있습니다. 포토샵이나 인공지능(AI) 같은 디지털 이미지 기술이 없던 시절, 이들은 사진을 찍고 그 위에 회화적 요소를 가미하면서 실험을 펼쳤습니다. 사진이 모사에 지나지 않는다는 편견은 아주 오래전부터 다양한 작가들에 의해 전복됐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도입입니다. 이승택은 형체가 지워진 사물의 흔적을 사진으로 남겨 조각적 사고를 확장했고 김구림은 광고판, 서예 이미지 등을 결합해 동양적 감각과 사진 매체를 교차시켰습니다. 올해 세상을 떠난 곽덕준 작가는 사진, 판화와 드로잉을 오가며 기록 이미지가 어떻게 새로운 조형 언어가 될 수 있는지 보여줬습니다.
김용철 <포토·페인팅-신문보기, 신문버리기>(1977) 흑백사진에 부분 탈색. ⓒ서울시립사진미술관
2전시실에는 1970년대 개념미술과 신문 이미지 실험의 장이 펼쳐집니다. 김용철(76) 작가의 ‘포토·페인팅-신문보기, 신문버리기’(1977)는 신문을 버리고 있는 작가 본인의 모습을 찍은 퍼포먼스 작품입니다. 신문이 검열의 대상이자 권력의 시녀로 기능하던 시대, 그는 신문을 다루는 몸짓 자체를 비판의 언어로 전환했습니다. 성능경 작가는 구멍 난 신문을 든 자신의 사진을 여러 장 모은 ‘신문읽기’(1976)를 통해 읽을거리 없는 신문과 숨 쉴 공간을 찾는 시민이라는 표상을 동시에 전달했습니다. 기획을 맡은 한희진 학예연구사는 “한국 작가들에게 신문은 단순한 자료가 아니라 현실을 해석하고 다시 구성하는 지적 통로였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이어 “미술 사조나 정치적 이념에 편중하지 않고 한국 현대미술의 실험적인 장면을 빠짐없이 담기 위한 노력의 결과를 이번 전시에 담으려 했다.”며 당시 신문이 작가들에게 영감을 주는 하나의 오브제였단 사실을 재차 설명했습니다.
이인현 <소리 I>(1981) 슬라이드 필름을 영사기로 상영. ⓒ서울시립사진미술관
3전시실은 1980년대 이후 작가들의 인식, 지각 실험을 다루고 있습니다. ‘내가 보는 사물, 사물이 보는 나’라는 질문을 꾸준히 던져온 이인현, 시각과 지각 구조를 탐색한 문범(70)과 김춘수(68) 등이 시간성과 움직임을 도입해 사진을 단일 이미지에서 해방시켰습니다. 사진을 매체가 아닌 경험으로 확장한 흐름을 따라간 구성입니다. 이어 4전시실은 사회와 정치적 현실을 전면에 드러낸 작품들로 채워졌습니다. 박불똥(69)은 판화와 사진의 경계를 허물고 복제와 원본의 개념을 비틀며 미술 유통 구조를 풍자했습니다. 정동석(77), 민정기(76) 작가는 신문 속 장면과 사회적 이미지를 재가공해 한국 사회의 구조적 현실을 화면에 불러냈습니다. 앞서 언급한 김건희의 <얼얼덜덜>도 이곳에서 시대의 정서를 압축한 작품으로 관람객의 시선을 붙들어 줍니다.
글. 이해원 기자
한국경제신문 문화부
※ 본 콘텐츠는 한경매거진앤북에서 제공한 콘텐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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