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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펜하이머>
열광의 이유
3시간이라는 긴 러닝타임에도 <오펜하이머> 영화에 대한 반응이 뜨겁다. 우리 현실과 맞닿아 있는 스크린 속 핵무기 논란과 각기 다른 분야의 학자들을 이끈 오펜하이머 리더십에 대해서 알아봤다.
늘 관객들에게 놀라움을 선사하는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이 이번엔 실존 인물을 소재로 선택했다. <오펜하이머>는 미국의 핵폭탄 개발 계획인 맨해튼 프로젝트를 이끈 과학자 오펜하이머의 이야기를 그린 영화다. 영화의 바탕이 된 평전은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로, 인류에 원자에너지의 축복과 저주를 동시에 선사한 인물 오펜하이머를 다뤘다.
오펜하이머는 전쟁의 혼돈과 무질서의 중심에서 자부심과 오만에 가득 찬 각기 다른 분야의 학자들을 이끌고 원자폭탄 시스템을 완성했다. 처음부터 불가능한 작전이나 다름없었던 이 프로젝트를, 대외적으로 이름을 알린 적이 없는 전형적인 대학 교수 스타일의 오펜하이머가 해낸 것이다. 오펜하이머는 어떻게 구성원들을 이끌 수 있었을까?
최고의 관리자, 오펜하이머놀라운 것은 오펜하이머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에 꽤 재능이 있었다는 점이다. 원래 물리학자들은 개성이 강한 사람들이고 로스앨러모스에 모인 이들 중에는 노벨상 수상자도 있었던 터라 이들을 하나로 모아 거대한 프로젝트를 성공시키는 것 자체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오펜하이머는 이들이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이끌었다. 각자의 능력과 장단점을 파악하는 능력이 뛰어났던 것이다. 덕분에 모두가 자신들이 프로젝트에서 어떤 중요한 일을 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오펜하이머의 이런 리더십은 현실의 우리도 배워야 할 부분이다.
오펜하이머는 다방면에 관심을 둔 사람이었다. 그에 대해 이야기할 때 스포츠 빼고는 모든 걸 다 안다는 농담을 했을 정도. 그는 한 가지 주제에 완전히 빠져들어 끝장을 보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한 주제에 대해 아이디어를 내고는 다른 주제로 옮겨가는 식이었다. 확실히 핵무기를 처음으로 개발하는 프로젝트의 연구책임자라면 한두 분야의 스페셜리스트보다 다방면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 훨씬 유리했을 것이다.
투명한 학자의 투명한 리더십학문의 투명성, 개방성에 대한 오펜하이머의 신념이 핵무기 개발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한 연구도 있다. 오펜하이머는 모든 연구 과정, 결과를 학자들에게 공개했으며 정기적으로 콜로키엄을 열어서 원하는 학자들 누구나 데이터와 성과를 확인하고 공유할 수 있게 했다. 결과적으로 연구실이 처한 문제를 더 잘 해결할 수 있도록 하고 절차상의 문제를 개선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 것이다.
오펜하이머는 연구소 내에서도 강의와 토론을 자주 실시했다. 모든 연구진이 참여한 강의에 이어진 토론에서는 창의적인 아이디어, 문제 해결에 결정적 도움이 되는 방안이 나오기도 했다. 오펜하이머는 과학자들이 최대한의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 일이라면 전체 책임자였던 그로브스와 맞서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웨스트포인트 출신의 공병이었던 그로브스는 뼛속까지 군인이라 철저한 보안과 위계질서 속의 조직운영을 선호했다. 과학자들을 파트별로 나눠 칸막이화해서 통제하려고 했다. 오펜하이머는 그런 방식이 과학자들의 자유로운 토론과 소통을 방해하고 결국 창의적인 발상에 치명적이라고 판단했다.
결국 오펜하이머는 과학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이 개방성과 수평적 소통을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맨해튼 프로젝트는 시작한 지 만 3년이 되기 전인 1945년 7월16일 최초의 핵무기 실험(‘트리니티’)에 성공했고 그로부터 불과 3주 뒤에 우라늄탄과 플루토늄탄을 사흘 간격으로 실전에 투하했다. 언제 끝날지 모르던 전쟁이 끝나는 순간이었다.
양심 있는 과학자의 인생전쟁 전후 달라진 게 있다면 핵무기를 바라보는 오펜하이머의 태도였다. 오펜하이머는 트루먼에게 “내 손에 아직 피가 묻어 있는 것 같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는 특히 수소폭탄 제조에 반대했으며 국제적인 핵무기 통제를 지지하는 입장이었지만 정치인들의 생각은 달랐다. 전후 세계질서에서 확실한 주도권을 쥐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더 큰 위력의 핵무기가 더 많이, 그것도 미국에 독점적으로만 존재해야 했다. 다른 누구도 아닌 핵무기 개발의 주역이 이런 입장에 반대하고 나섰으니 그의 영향력을 무시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아마도 오펜하이머가 자신의 소신을 숨기고 조용히 살았다면, 또는 권력의 요구에 따라 소신을 바꾸었더라면 말년까지 국가적인 영웅으로 엄청난 부와 명예를 안고 살았을 것이다. 그 선택의 순간에 자기의 이익보다 자신의 손에 묻은 피를 잊지 않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게 그는 끝까지 자신의 소신과 양심을 지키며 국가에 대한 반역으로 몰렸고, 고초를 겪어야 했다. 조직의 뜻에 반하고, 자신의 양심에 따라 움직이는 것은 과거에는 지금보다 훨씬 더 어려운 일이었다. 그럼에도 오펜하이머는 자신의 신념을 잃지 않았고, 우리에게 <오펜하이머>라는 전기 영화로 기억되는 인물이 되었다.